김용성.jpg

동지는 ’50년 8월부터 9월까지 문경군 농암면에서 인민위원회 서기장으로 근무하다 9월 말 이북으로 가 ’51년 4월부터 ’53년 8월까지 황해도 평천군에서 금산인민학교 교원, 조포중학교에 근무했다. ’54년 4월부터 ’57년 4월까지 황해도 재령읍에서 재령여자사범전문학교 역사교원으로 근무했다. ’57년 4월부터 7월 말까지 공작원 교육을 받고 8월 3일 서울에 도착했다. ’62년 4월 20일 서울 성수동 집에서 서울 특무대에 의해 국가보안법위반 혐의로 체포, 구속됐다. 동지는 ’62년 4월 30일 서울교도소에 입소하여 6월 7일 육군고등군사법원에서 간첩미수죄로 징역 15년을 선고받고, 대법원에서 확정 판결 후 ’64년 6월 5일 대전교도소에 수감되었다가 ’68년 4월 광주교도소에 이감되어 수감생활을 했다. ’77년 6월 10일 징역 15년의 형기를 종료하고 만기 출소할 예정이었으나, 사회안전법에 의해 보안감호처분을 받아 출소하지 못하고 ’78년 11월 18일 청주보안감호소로 이입되어 수용생활을 하게 됐다. ’79년 4월 27일 보안감호처분 기간이 갱신되어 계속 피보안감호자의 신분으로 수용생활을 하했. 동지는 ‘이미 주어진 형량을 다 치르고 만기출소한 사람인데 이렇게 구금시켜 놓는 것은 말도 안 된다, 죄인이 아니니까 죄인처럼 취급하지 말라’고 지속적으로 주장했으며, 서적압수 조치를 계기로 ’80년 7월 9일 사회안전법 폐지와 보안감호제도 철폐, 보안감호수용자들에 대한 처우개선 등을 주장하며 집단 단식농성에 참여했다. ’80년 7월 11일 청주보안감호소장은 단식농성을 중단시키기 위해 감호과장과 의무과장를 호출, 강제급식을 지시하였고, 감호과 사무실에서 강제급식이 실시괬다. 강제 급식을 받던 중 갑자기 ‘억! 억!’ 소리를 내다가 고개를 옆으로 떨구면서 쓰러져 운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