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광석수정.jpg

’75년 4월, 박정희 정권은 ‘긴급조치 9호’를 발동하여 탄압의 강도를 높여갔다. 5월에 김상진 동지 추모시위가 힘차게 벌어졌고, 당시 사범대 시위책임을 맡았던 동지는 체포, 구속되었다. 수감 당시 나중에 아내가 되는 강정숙씨에게 쓴 편지는 후에 옥중서한문집 ‘그 어딘가의 구비에서 우리가 만났듯이’에 수록됐다. ’80년 서울의 봄 이후 계엄포고령 위반으로 체포되어 40여 일간 모진 고문을 당했는데 이때의 고문체험을 ‘애국가’ ‘검은 장갑’ 등의 시에 쓰고 있다.

’83년부터 동지는 본격적인 문학평론 활동을 시작했다. 그리고 다음해인 ’84년 3월 14일 민중문화운동협의회의 창립과 동시에 실행위원으로 임명됐다. 또한,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문화예술분과위원장에 임명되면서 박노해 시인을 발굴해 민중문학의 한 맥을 이뤘다. 민중문화운동협의회의 창립을 계기로 이후 타계할 때까지 문학운동을 비롯한 문화운동 전반에 걸쳐 맹렬한 활동을 전개했다. 그리고 그 해 가을 신협에서 의원 면직후 자유실천문인협의회 재건 작업에 뛰어들었다. 이후 운명 때까지 문화운동 전반에 걸쳐 맹렬한 운동을 전개하는데 운명일인 ’87년 7월 12일 ‘민주시민대동제’가 끝난 후 ‘민운연’ 노래패 사무실에서 가진 술자리 후 귀가 길에 택시교통 사고로 운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