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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는 ’58년 9월 2일 국가보안법 위반과 간첩 미수로 검거,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대전교도소에서 복역하던 중 ’74년 7월 20일 오전 6시 30분 경 시체로 발견되었다. 당시 사인은 좌측총경동맥과 우측대퇴동맥의 절단으로 인한 실혈사였다. 동지는 ’61년 6월 민주주의를 전 민족적인 최고 이상으로 보며 통일의 방법은 유엔감시하의 남북총선거라고 했으며, 사망 일주일 전엔 “북의 가족 때문에 전향할 수 없다”고 했다. 당시는 박정희의 영구집권을 위해 ’73년 8월 6일 모든 좌익재소자의 전향을 목적으로 대전교도소 등에 전향공작전담반이 조직됐고 ’73년 8월 30일경 중앙정보부와 대전교도소 전향공작반은 전향공작활동의 성과를 높이려고 폭력재소자 2인과 좌익재소자 1인을 합방시켜 폭행으로 전향하도록 할 것을 결정했다. ’74년 7월 19일 오전 특별사동 담당 교도관과 사방청소부는 지급한 약품의 개수가 장부와 맞지 않는다는 것을 빌미로 전향공작하기로 작심하고, 같은 날 오후 1시경부터 오후 4시경까지 동지를 창고 또는 관구실로 연출하여 머리를 때리고, 전신을 발로 차고, 바늘로 찌르는 고문을 했다. 결국 동지는 ’74년 7월 20일 오전 6시 30분경 시체로 발견됐으며 거실바닥에 피가 흥건한 상태였고 벽에는 ‘전향 강요 말라’는 혈서가 있었다. 당시 검사는 검시 후 실혈사로 판단했으며 폭행교도관 김모씨는 ‘교무과 말만 들었으니 네가 책임지라’하여 사직하였고, 사방청소부 이모씨와 전향공작반원들은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