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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는 자신의 청년시절을 청년운동의 발전을 위해 온전히 바친 청년운동의 지도자였다. ‘부산민주청년회’(부민청) 활동을 시작으로 부산지역 구 단위의 청년조직을 묶어 부산민청을 건설했고, 전국의 각 지역청년회를 단결시켜 ‘한국청년단체협의회’(한청)을 건설했다. 그리고 재일한국청년동맹(재일한청)과의 교류에 물꼬를 열기도 했다. 박장홍 동지는 조국통일의 이정표인 615공동선언을 자신의 삶의 좌표로, 운동의 좌표로 하여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앞당기기 위한 투쟁을 끊임없이 벌여낸 통일운동가였다. 민족통일대축전를 비롯하여 남북해외청년학생통일대회를 성사시켜냈고, 북녘청년들의 조국건설투쟁에 함께 마음과 뜻을 모아내었으며, 해외동포청년들과의 연대를 돌파한 주역이었고, 미국의 대북적대정책, 대한반도지배정책과 해내외반통일세력에 반대하여 투쟁한 선봉장이었다. 이렇듯 박장홍 동지의 투쟁과 삶은 615시대, 변혁과 통일을 완수해 나갈 한국청년운동의 오늘날 당당한 모습을 만든 밑거름이었다.

박장홍 동지는 2006년 8월 12일 오후 고등학교 동기와 만난 뒤 울산에 있는 부인을 만나기 위해 친구와 헤어졌다. 그러나 부인과 통화를 한 뒤 오후 6시경 길에 쓰러졌고(추정), 다음날 오전 10시경에 무의식 상태에서 행인의 신고로 동의의료원에 후송되었다. 같은 날 오후 대동병원으로 옮겨 진료한 결과 뇌부종이 발견되어 중환자실 치료를 받기 위해 8월 14일 고신의료원으로 후송되었다. 그러나 저혈당으로 인한 심각한 뇌손상이 발견되었고 19일간의 치료에도 불구하고 결국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8월 31일에 운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