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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는 전남 광양 고량면 태인도(현 동광양시 태인동)에서 출생하여, 1932년 보통학교 6학년때
광주학생운동의 소식을 접하고 이에 응원동맹휴학을 주도한 혐의로 경찰에 연행, 고문으로 한 쪽 고막이 파열되기도 했다. 4월에는 치안유지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진주소년원에서 6개월간 복역했다. 1933년 광주고보 (현 광주서중)에 진학, 재학중 진보적인 선생님의 주선으로 일본 와세다대학에 진학, 재학중 비밀결사 독서회사건으로 중도에 귀국하여, 서울외국어전문학원을 다님. 졸업 후 비밀조직인 '전남지역 사회운동협의회' 사건으로 은거생활을 하다가 8.15를 맞고, 상경하여 여운형이 주도한 건국준비위원회, 민주주의민족전선에 서울시 대표로 참여하였다.

여운형이 주도한 근민당에 입당, 성북구 부위원장 및 당중앙위원과 총무부차장으로 활동하였으며, 1948년 이승만의 단정수립에 반대하여 통일독립운동자협회의 실무비서로서 큰 역할을 하고, 평양 전조선제정당사회단체대표자연석회의, 남조선인민대표자회의에 참석하시는 등 하나의 조국을 위하여 헌신적으로 활동하다, 1953년 9월14일 북쪽의 밀파간첩혐의로 대구고법에서 징역2년을 선고 받고 1955년까지 복역했다. 1960년 4.19를 맞아 활동을 재개하며 사회당준비위 구성하였고, 민자통중앙협의회가 결성되자 바로 서울시협의회를 구성하고 사무국역임. 한미경제협정 및 반공법 제정반대운동과 5.3일 남북학생회담 지지대회 조직하는 등 민족의 자주적 통일을 위하여 가열찬 활동을 전개하였으나, 1961년 5.16군사 쿠테타로 5월22일 체포되어, 군사법정에서 사형을 언도받고, 12월 21일 오후4시 민족일보 사장 조용수와 같은 시각에 집행되어 운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