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열사들이 그토록 바랬던 내일입니다.
우리를 일으켜 세우는 열사들과 함께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 갑니다.
그들은 아직도 우리들의 가슴속에 남아 숨쉬고 있습니다.
출생 | 1901년~1989년) 당시 88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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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일 | 1989-02-04 |
약력 | 1901년 3월 13일 평북 용천군 출생 1916년 양시 공립 보통학교 졸업 및 관립 평양고등보통학교 입학 1919년 3·1 운동에 참가한 후 학업 중단 1938년 3월 창씨개명과 일본어 수업을 거부하고 오산학교를 사임 당함 1940년 8월 동경에서 계우회 사건으로 평양 대동경찰서에 1년간 복역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아 고향에서 용암포 자치위원장, 용산군 자치 위원장이 됨 1956년 서울 용산구 원효로에 사택을 마련, 이때부터 「사상계」 집필 시작 1970년 4월 19일 잡지 「씨 의 소리」 창간호 발간 1971년 8월 삼선개헌반대투쟁위원회를 구성 활동. 민주수호국민협의회를 조직하여 대표위원으로 1975년까지 활동 1971년 11월 13일 전태일 1주기 추도회 및 강연회를 시작으로 씨알의 소리사 주체로 1975년까지 해마다 계속함 1974년 11월 윤보선, 김대중과 민주회복국민회의를 만들고 대표위원 역임 1979년 11월 23일 명동 YWCA사건으로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에 끌려가 15일간 구속 1985년 퀘이커세계협회 멕시코 종교대회에 참석 두 번째로 노벨 평화상 후보로 추천 1989년 2월 4일 운명 |
요약 | 평생 일관된 사상과 신념을 바탕으로 항일·반독재에 앞장 |
묘역 | 연천군 전곡면 간파리 감악산묘소 |
홈페이지 | http://www.ssialsori.net |
’23년 오산고등보통학교를 거쳐 ’28년 일본 도쿄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모교에서 교사생활을 했다. ’40년 평양 근교의 송산농사학원을 인수, 원장에 취임하였으나, 곧 계우회사건으로 1년간의 옥고를 치른 후 8·15광복 때까지 은둔생활을 하였다.
광복이 되자, 평북 자치위원회 문교부장이 되었으나 같은 해 11월에 발생한 신의주학생의거의 배후인물로 지목되어 투옥되었다. ’47년 단신으로 월남, 퀘이커교도로서 각 학교·단체에서 성경강론을 하였다. ’56년 「사상계(思想界)」를 통하여 주로 사회비평적인 글을 쓰기 시작하였는데, ‘한국기독교에 할말이 있다’라는 글로 신부 윤효중(尹孝重)과 신랄한 지상논쟁을 펴 큰 화제를 일으켰다.
’70년 「씨 의 소리」를 발간하여 민중계몽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76년의 명동사건, ’79년의 YMCA 위장결혼식 사건에 연루되어 재판에 회부되는 등 많은 탄압을 받았다. ’80년 「씨 의 소리」가 강제폐간되어 문필생활을 중단하였으며, ’84년에는 민주통일국민회의 고문을 지냈다. ‘폭력에 대한 거부’, ‘권위에 대한 저항’ 등 평생 일관된 사상과 신념을 바탕으로 항일·반독재에 앞장섰다. 저서에 「뜻으로 본 한국역사」, 「수평선 너머」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