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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는 ’08년에서 태어나, 12살 때 3·1 운동에 참가했다. 경찰 주재소를 파괴하여 동지는 일본 헌병에 붙잡혔지만, 어려서 매만 맞고 풀려났다. 이때 동지의 내면에 뿌리내린 민족자존 의식이 한평생 독립운동, 통일운동으로 이어졌다. 국내에서 항일운동을 하다가 일제의 감시를 피해 중국으로 망명했다. 동지는 마카오에서 임시정부 연락책을 맡았다. 임시정부에 독립자금을 보내고, 중국의 일본군 동태를 보고했다. 해방직전 귀국하여 일제에 구속되어 수감 중 해방 후 감옥을 나왔다. 해방 후 동지는 ‘남북통일이 없으면 우리 민족은 진정한 독립을 이룬 것이 아니다’라는 백범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광복 뒤 동지는 한국독립당(한독당)의 중앙집행위원을 맡았다. ’48년 4월 동지는 단독정부 수립을 저지하기 위한 남북협상을 위해 백범과 함께 평양을 방문하기도 했다. 이후에 백범을 지지했다는 이유로 이승만 정권에게 사업체를 뺏기고 정치 활동이 묶이는 가시밭길을 걸었다.

동지는 평화통일정책에서 백범을 계승한 조봉암을 도와 진보당 재정위원장을 맡았다. ’59년 7월 ‘진보당 사건’에 연루돼 옥고를 치른 동지는 5·16 군사 쿠데타가 발발하자 혁신계 인사로 분류돼 수감된 후 동지는 반독재와 통일운동의 길을 걸었다. 80, 90년대에 조국통일범민족연합 활동을 통해 각종 집회, 시위에 빠짐없이 참석하는 등 민간통일운동의 앞자리를 지켜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