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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독립군의 모습을 지켜보며 민족의 현실에 눈을 뜬 그는 임시정부로 갈 계획으로 국경을 넘다 일본 헌병에 붙잡혀 지원병 훈련소로 압송됐다. 그 뒤 평양 근처 채석장에서 중노동을 하면서 `’민족해방협동단’이란 항일운동단체에 가입해 독립운동을 했다.’45년 해방되자 고 장준하선생의 권유로 백범 김구 선생 밑에서 일을 했다. 백범의 영향 아래 신탁통치 반대투쟁에 나섰고, 백범의 남북협상을 지지하며 삭발을 하기도 했다. 서울대 문리대 학생회장 때는 ‘국대안 반대투쟁’을 이끌었다.

동지는 5·16 쿠데타가 일어난 뒤 민주화운동의 가시밭길을 걷기 시작한다. 3선개헌반대투쟁위 상임위원, 「사상계」 편집장, 민통련 부의장을 지내며 반독재 민주화투쟁에 앞장섰다. 이 과정에서 3차례나 투옥됐고, ’80년에는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에 연루돼 도피생활을 했다. 그 후에도 민통련 의장, 전국연합 상임고문을 역임하며 한반도의 혁명적 변화와 민주화를 위해 평생 동안 투쟁을 계속했다. 동지는 지난 ’95년 고문 등으로 얻은 지병인 폐질환이 악화돼 치료를 받기 시작했다. 병상에서도 나라를 먼저 걱정하던 선생은 자서전 `나의 투쟁, 나의 일생’을 집필하기도 했으나 끝내 마치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항상 흰 고무신에 작업복으로 민주화운동 현장을 누볐던 옷차림이 말해주듯 동지는 저항정신과 청렴성, 도덕성의 상징이었다.